그걸 또 놓쳤다. 웃기게도 몇년전일이 주마등처럼 스친다.또 그때와 같게 또 그때처럼.
추억이라는건 나뭇잎을 간질이고 사라지는 바람처럼 한순간인데,그걸 기억하고 살아야했는데.매년 여름이면 녹음이 우거진 숲속으로 바람이 샅샅이 기어들어가기에 다음 여름도 또 그렇게 찾아올줄로만 알았다.한순간이라는걸 기억했어야했는데.
카페에서 책 좀 읽다가 직장에 들러 케이크 좀 전해주고 왔다가 집으로 돌아갈려는 찰나 그냥 무심코 햇볕이 좋아서 갑자기, 담배 한대가 피고싶어졌다.보헴 시가 모히또가 그때 내 첫담배였는데 이름이 바뀌었다더라.맛이나 향을 표기할 수 없다나 뭐라나.
쿠바나 일미리주세요- 말하며 라이터 하나를 집어드는데 왜이렇게 중학생이 편의점직원 속이며 담배사는 느낌이 드는건지 참.
그렇게 한손에 라이터,한손엔 담배.그러고 털레털레 걸어가는데 흡연할 곳이 안보였다.그냥 의자 하나만 나오면 되는데, 근처 아파트 놀이터로 가보자싶어서 갔더니만 꼬맹이들이 놀고있길래 발길을 돌렸다.예전부터 알고있던곳이 하나 있었다.학생때부터 학원때문에 그곳을 지나다녔는데,거긴 중고딩들 모여 담배피던 핫스팟이었다. 막상 도착해보니 아파트내에서도 문제를 알았는지 이미 그 스팟은 휴지통부터 의자까지 철거당하고 난 뒤였다.
뭐지. 어디가야되는거지.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그냥 의자 하나 나와라 하고 걷던것 뿐이었는데.어쩌면 날씨가 너무 따뜻한 탓이었다.여름 기분이 났던 탓이었다.옛날에 살던 아파트에 가보고 싶어졌다. 그래 이왕 여기까지 온거 좀 더 걸어볼까. 내가 이 지역에 처음 이사와 살게된 아파트, 아빠가 숨진 아파트 그곳.
적당히 따뜻한 날씨 그러나 시원한 물은 필요한 날씨.생수 하나를 사서 주변 구경도 할겸, 견학 온 학생의 자세로 이 골목은 이렇게 달라졌구나,저 골목은 저렇게 달라졌구나 생각하며 계속 아파트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알고는 있었다 재개발중인거.
언제 한번 친구가 그랬다.야 너네 그냥 거기 계속 살지 너무 아깝다.나는 말했다.그래 아깝다. 근데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아까울 수 없었다.집안이 튼튼하고 부유한 친구는 내 사정같은거 우리집같은 집도 있다는걸 잘 모르는듯했다. 다른 사람들 입으로 뉴스로 아무리 들어도 보아도 그건 체득할 수 없다. 그냥 그렇게 태어나고 그렇게 살지 않은이상 모르는게 정상이니까.
그 낡은 아파트도 우리는 친척들의 도움을받아 간신히 들어갈 수 있었다.재개발 들어간다고해서 아무런 이익도 챙길수없었다.집주인이 아니니까.아빠가 죽고 난 뒤 실제로 재산이랄것도 없었고 다른 임대아파트로 들어가게 된것이다. 그러니 건물 몇채를 가지고있는 집안에서 자란 친구는 알 수 없는게 당연했다.아무리 나의 고민을 옆에서 들어왔어도 말이다.
낡은 연립주택 사이로 새로 짓고있는 건물들,더욱 강성해져 역세권으로 자리를 옮겨버린 교회건물.그 빈자리를 채우고있는 새로운 원룸주택들. 골목골목 나는 다 기억이 나는데, 역시 또 변해있었다.
문방구였던 곳은 어느 빌라의 뒷주차장이 되어있었고 일자로 뚫린 골목끝엔 원래 전에 살던 아파트 놀이터가 있어야했는데, 놀이터는 없고 건설회사의 마크가 새겨진 높은 바리케이트만 있었다.그 놀이터 그네에 앉아 한대만, 딱 한대만 피우며 주변을 둘러볼 요령이었다.집에 들어가기 무서워 나를 하루종일 앉아있게 만들었던 그 그네가 필요했는데 없었다.높은 바리케이트 사이로 보이는건 그냥 깊숙히 파여져있는 땅과 널브러진 철근들.
처음부터 어떤 건물도 없었던것마냥 그냥 그렇게.주변으로 건설자재를 나르는 한두명의 인부들을 보며,아빠생각을 하고 내 생각을 했다.검게 탄 피부위로 흐르는 땀.노동자.노동하는 노동자.노동하는 아빠.그 피 그대로 속일 수 없는 나.
몇달만 일찍 올걸 그랬나봐.오래된 나무도 있었는데 항상 그 나무 그늘을 생각해오기만 했지.다시 가볼 생각은 못했다.그렇게 오랫동안 그 옆을 지나오면서 어떻게 가볼생각을 못했을까 오늘 오지않았더라면, 난 완공된 커다란 아파트단지 앞에서 가만히 서있다 돌아왔으려나.
이제 정말 내 기억에만 있는 곳이 되어버린 내 낡은 아파트.난 여름이 좋았다. 지금도 좋다. 하루가 느즈막하고 길어져서 좋았다.아빠도 여름에 갔다.온통 괴로움으로 하루가 길어졌다.11년이 지났을까.다 커서 다시 찾은 내 옛날 터.그곳이 없어졌어.
예전 겨울에 기차를 타고 추억을찾아 방황하던때랑 똑같네. 똑같이됐네. 추억은 소중한만큼 빨리 날아가버린다는걸 깜빡하고 내 머릿속으로만 그림을 그렸네.어쩌면, 상상으로 남겨둔 추억이 훨씬 예쁠지도 모른다.내가 약해서 그럴까.원래 흐르고 지나가는게 사라지는게 추억인데 내가 자꾸 그걸 잡으려고 노력했나보다.세상 사람들 말대로 말하자면 ‘미련’
이 근처 공원벤치에 앉아서 담배를 폈다. 옆엔 할머니 무리들이 에이라는 사람이 죽으면 비라는 사람도 죽고 씨라는 사람도 곧 죽고 산다는건 다 죽는거야같은 말을 늘어놓는걸 듣고있었다. 담배가 담배같지도 않았다.가볍다. 인생도 이렇게 가벼우면 훨훨 날아가버릴텐데.
조금만 일찍올걸.이런 후회도 추억이 되어 날아 가버렸으면 좋겠다. 내 하루하루가 그냥 그렇게 흘러버렸으면 좋겠다. 강물처럼.어차피 간절히 바라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거니까 간절히 바라지도 않으련다.
그래도 골목골목 사람사는 냄새 맡은것만으로도 나는 좋았다.작은 공사장현장,방치된듯 잡초가 우거진곳에 문득문득 묻어나는 사람냄새.나에겐 그게 고향이다.누군가는 그게 관광이겠지만 이제껏 나는 그런게 인생이었다.
돌아가고싶다. 흙바닥으로.
돌아가고싶다.파란 천막으로.
그 천막으로 지붕을 막아 빗방울이 안방 한가운데를 적시던 그 쓰러지던집.집이 없어 아빠가 얻은 컨테이너로 한 겨울을 나던 그 밑바닥과 위태로움과 슬픔이 그립다.적어서 나열하자면 다 나열할수도없는 그 구질구질함이 그립다. 댐이 넘칠까봐 홍수때면 모래주머니를 쌓아올리던,시골 촌구석에서 사는게 전쟁같던 그때가 그립다.보이는건 그런것뿐이다.사진 찍고싶은건 그런것들뿐이다.내 추억 내 기억 내 냄새 우리 가족의 냄새는 자꾸 그런데에서 온다.
삶을 이어오기 위해 터전을 몇십번 옮겨다녔던,겨우 노숙가족을 면하며 살았던 그때가.웃기게도 나에게 동심이란 그런 흙냄새라는게 참.
길바닥,낡은 골목,자동차 밑에숨어있는 고양이,문을 열었는지 닫았는지 구분도 안되는 목공소들,나뒹구는 페인트통,버려진 탁자들,땅바닥에 던져진 빨갛게 녹슨 공구들.그러고도 그 위 빨랫줄에 널려있는 젖은 빨래들.난 그걸로 맡는다.삶이 이어지는 냄새를. 내 냄새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