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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다 : 왜 살아있을까

#살아있다 : 왜 살아있을까

 #ALIVE, 2020 조일형

 

엄청 오랜만에 영화감상 쓰려니 살짝 떨린다. 얼마 전 보고 온 <#살아있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한다. 앞에 해시태그가 붙는건 나름대로 의미가 크다. 사실 좀비영화를 워낙 좋아하는지라 해외 인디영화까지 싸그리 모아모아 보는 나에게 이 영화가 당연 재밌지 않을거라고 생각은 했다.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올해 본 영화 중 워스트3 안에 꼽는다. 난.

 

생존영화에 오류는 치명적이다

그런데, 살아있다에는 치명적 오류들이 자주 등장한다. 일단 우리가 다른 영화들로 학습해왔던 다른 좀비들과 조금 다르게 설정이 되어있다. 예를 들자면 이 영화속 좀비들은 시각과 후각 청각이 예민하고, 좀비가 되기 전 습관적으로 하던 행동들이 뇌 속에 박혀 그대로 행동한다. 그런데 이런 설정들이 디테일하지 않고 중간 중간 오류를 반복한다. 설정이 설정을 뒤엎고 또 뒤엎는다. 이 영화가 스케치업 한 좀비들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으니 집중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주인공 준우가 옆집 열쇠를 가지러 가기 위해 복도로 나가는 시퀀스 또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좀비가 갑자기 왜 잠들어있는가. 심지어 자기가 쳐죽인 시체도 아닌데, 그냥 좀비 무리에 깔려죽은 좀비인가. 난 이때부터 '엉성한데?'라고 느꼈던 것 같다.

또 준우와 유빈이 등산용 로프로 물품을 주고받는 장면도 심각한 설정 오류이다. 둘이 층수가 맞으면 절대로 그대로 물건을 주고 받을 수 없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스피드가 없는데, 중간에 멈추면 멈췄지. 만약 둘이 층수가 다르다고해도 그것도 문제다. 고층에 사는 사람이 물건을 전달 받을 수 없다. 솔직히 좀비영화는 단순 스릴러나 공포물이 아니라 재난이자 생존영화라고 본다. 그럼에도 디테일이 떨어지는 설정이 내내 아쉬웠다. 제작비가 싸서 그냥 찍었나 싶을정도로.

말할 수 있는 오류는 너무 많지만, 엔딩 이야기를 안 할 수 없겠다. 방향이 안맞는다. 궁지에 몰린 두 주인공들을 그냥 죽이지 않으리란것 쯤은 알고 있었다. 잔인하게 물려죽으면 미드나잇 초청받은 인디영화지. 한국 상업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너무 안일하게 처리하지 않았나 싶을정도로 애매한 타이밍에 애매한 군용헬기가 등장해 그들을 구출해준다. 갑자기 나타날 수 있다. 어떤 영화든 그냥 바람같이 나타나서 해결해주는 람보같은 인물들이 있으니까. 그럼 아파트 아래를 내려다보는 샷을 넣음 안됐다. 사실, 찍을 수 있는데, 이건 편집의 문제가 크다고 본다. 확인을 안한걸까. 1초전까지 아무것도 없다가 갑자기 아래에서 등장한 헬기를 설명 할 방법이 없다. 포털을 열고 왔다는 설이 제일 설득력있을정도로...차라리 저 멀리 위에서 총질을 해서 좀비를 쏴죽였다면 모르겠다. 헬기가 위로 올라올때까지 귀 밝은 좀비들도 모른척 반응이 없었다는게 너무 짜치지않나...

 

시간 경과에 따른 디테일이 부족하다

일단, 준우 캐릭터는 그냥 요즘 캐릭터 같다. 게임 좋아하고 인터넷방송도 하는 듯한. 만화캐릭터처럼. 그렇다고해서 준우가 한달 이상 집에 갇혀있는데, 머리가 떡지지도 않고 뿌리가 자라지도 않는 인물은 아닐텐데. 준우는 그대로다. 그냥 느껴진다 두두다다 몰아서 존나 찍었겠구나. 디테일의 문제라하면 뭐 유아인 몸값 비싸니 몰아찍느라 그랬다하면 할말은 없는데, 적어도 땟국물 가득한 얼굴이 아니라는게 정말 몰입이 안되더라. 이건 박신혜 경우가 더 심각하다. 너무 멀끔해도 심각할 정도로 멀끔하다. 좀비를 그렇게 때려죽이면서 핏자국 하나 안튀는 그녀의 얼굴은 방수재질이라도 되는건가. 심지어 아파트 한 동을 건너오면서 벌어지는 난투극에도 박신혜는 멀끔하다. 세상에, 보다가 진짜 이정도로 몰입 안되는건 처음이다. 참고로 <워킹데드>같은 드라마에서는 훨씬 몸값 비싼 배우들도 얼굴 머리 기름떡칠을 하며 거지꼴로 나온다. 적어도 한달이면 멀끔할 수 없다. 심지어 유빈은 식물한테 물도 나눠 줄 정도로 사랑이 많은 캐릭터 아닌가. 자기 쓸 물도 모자랐을거면서...빗물로 씻었다 이건가?

얘기 나온김에, 이 영화에서 박신혜 연기 정말 심각하다. 디렉팅 잘못인지 박신혜의 고집인지 나는 알길이 없지만. 솔직히 유아인도 특유의 본인의  쪼 때문에 중간중간 몰입이 깨지는 순간이 있었지만 맹세코, 박신혜만큼 집중력을 흐리게 만들진 않았다. 정말 배우에게 악감정은 없지만, 톤에 대한 연구를 정말 정말 많이 해야 할 것 같다. 극이 후반부를 넘어가면서 <엑시트> 의주 캐릭터를 모방한건가 싶을정도로 비슷한 느낌이 많이 들었는데. 이건 뭐 대본이랑 디렉팅 문제겠지. 박신혜 배우한테 어울리는 영화도 아니었고, 어울리게 연기 하지도 않았다.

 

죽고 싶지 않으면 SNS를 해야한다는 무서운 교훈

아니, 그래서 하고싶은 말이 뭐야? 라고 물으면 감독은 얘기해 줄 수 있을까. 사실 영화를 보는 내내 미약하게나마 복선을 이웃간의 단절, 도심 속 사람들이 얼마나 외톨이로 살아가는지 등등 거시적 관점에서 무언가를 비판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구나. 느끼긴 했는데 (솔직히 이마저도 진부했지만) 그런게 싹 사라지고 어이없는 헬기씬을 넘어 등장한것은 그냥 아파트마다 떠 있는 SNS계정 사진들. 뭐 어쩌란 말인가. 살아있다고 외쳤기 때문에 살아있다. 이런 말인가? 나는 이 영화가 어려워서 이해 할 수 없는 것 같다. 또 위화감이 안 들 수 없는게, 준우 부모님은 추측상 아주 잔인하게 좀비들에게 물려 죽었다. 구출 되고 친구들에게 연락오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행복하게 웃으며 끝나면 끝인가. 주인공의 감정이 너무 단조롭다. 그래서 더욱 두 주인공이 겪은 일련의 사건들이 극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부모님도 인스타그램을 했다면 죽지 않았을텐데. 노인들도 인스타그램 할 줄 알았으면 안 죽었을텐데. 기술이 만든 이 무서운 세대단절이란....

 

좀비에겐 과제가 있다

사실 살아있다에게도 어려운 도전이었을거라고 본다. 국내에서 <부산행>이 크게 흥행한것도 한 몫 했지만, 사실 영화를 보는 내내 드는 생각은 '좀비도 이제 낡았구나' 라는 생각이었다. 지금까지는 꽤 신선한 축에 속했는데, 이젠 늑대인간 만큼이나 지루하고 따분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기존 좀비를 새롭게 연출하는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월드워Z>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좀비를 새롭게 고안해냈다고 느낀다. 살아있다는 그런 관점이 부족했던 것 같다. 아마 복도식 아파트의 폐쇄성과 좀비가 붙으면 재밌지 않을까라는 안일한 방식으로 영화가 구현되지 않았나 싶다. 아, 정말 진부했다. 솔직히 이건 내가 좀비물을 좋아해서 더 그런걸 수 있다. 중간에 등장한 남자 또한 너무너무 진부해서 할 말이 없었다. 원래 자기 가족 좀비된 걸 못 받아들이고 그 남자처럼 데리고 다니는 인물들이 더러 있다. 근데 그걸 살아있다 속 주인공들이 갑자기 마주칠 필요는 없잖아? 이 난리 속 한 남자의 비극을 짧게나마 조명하고 싶었던걸까. 그럼 앞에 준우와 유빈의 러브스토리 아닌 러브스토리같은 지루한 씬들이나 좀 쳐내지. 이건 균형의 실패다. 어쨌든 좀비는 이제 낡아가고 있다. 때문에 단순히 세련된 연출이나, 독특한 장소만으로 해결하지 못할 것들이 산처럼 쌓여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부산행>도 영화가 뛰어나서 흥행한건 아니잖아? 아직도 이거 마지막 장면이 짜쳐서 어이없는데. 여튼, 성공적인 국내 좀비 영화가 나오려면 많은 연구가 있어야겠다는 사실. 그리고 그게 꼭 헐리우드식 답습이 아니어도 되겠다는 생각이다. <킹덤>은 그런 면에서 잘 하고 있다. 내 취향이 아닐뿐.

 

그리고 드론이랑 등산용장비 나오면 이제 엑시트밖에 생각이 안 날듯 하다. 궁금한건데 21세기형 힙한 영화라고 꼭 드론이 등장 할 필요는 없는데. 드론 좀 잃지.

 


내 우상이었던 김기덕감독에게

내 우상이었던 김기덕감독에게


그의 영화를 졸라 좋아했다.
날것의 냄새가 나고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고 치열하고 열등적인 그 꼴통같은 냄새가 좋았었다.그렇게 인간의 어둡고 수치스러운 부분을 표현해내는것에 대해 동경했다.맥락을 초월하는 파괴적인 색채가 너무 아름다웠다.동시에 두렵기도했고.더욱 김기덕의 영화는 도덕적관념에 대해서 여러 문제를 던져주어서 참 좋아했다.많이 좋아했다.김기덕 영화중 안 본 영화는 단 한편도 없었고 나는 내가 글을 쓰게되면 김기덕의 영화로 책을 한권을 쓸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영화는 영원히 수작으로 남겠고
영화를 흠 잡기는 어렵겠지만


이 모든 논란속에서 나는 김기덕감독에게 묻고싶다. 영화를 자기 욕구충족의 도구를 이용한 자기자신의 열등감을 또 영화로 승화시키는 본인 자신이 부끄럽지 않았는지.

우상이었던건 우상인거고 우상은 지나간다.
당신은 내가 이뤄낼 모든 끝의 과정이다.
결국 우상에 지나지 않을거였는데 무슨 신처럼.

나는 내 영화를 할거고, 나는 배우들을 다치지 않게 할것이다.그사람들의 영혼을 나보다 소중하게 다룰것이다.당신과는 무조건 다를것이다. 메가폰을 잡는게 절대 권력이 아니거든 책임과 무게거든.


당신은 모든 사람들에게 사죄하고 또 나같이 당신을 우상으로 삼던 사람들에게 사죄했으면 좋겠다.꼭 벌받아라.배우의 영혼을 다치게 한 감독은 이미 죽은 감독이다.그리고 그런 감독은 내가 꼭 영화판에 발 들여서 온몸으로 밀어내고 없애고싶은 부류이다.내가 들어가서 쓸어버릴거야.이런 감독들이 사라져야 한국영화가 발전하지.난 이제 용납할수없다.당신의 감독자격은 내가 박탈시킬것이다. 더불어 조재현도 마찬가지야 뮤즈는 무슨 뮤즈.그냥 둘이 손잡고 사라져줘 내꿈을 위해서. 찬란하고 순수한 나를 위해서 사죄하고 영화 관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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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딸 : 진부함 그 자체

아빠는 딸 : 진부함 그 자체

Daddy You, Daughter Me, 2017 

김형협



한참전에 본 영화인데 이제야쓴다.영화 제목부터 엄청나게 뻔하디 뻔한 이야기가 시작될거라고 예상했다면 맞았다.이건 정말 엄청나게 뻔하다.너무 안전하고 게으르다는 생각도 든다.극중 아빠역할을 맡은 윤제문과 딸 역할을 맡은 정소민의 몸이 뒤바뀌면서 서로 이해못했던 둘을 이해하게되는 훈훈한 가족드라마이다.영화는 예상한대로 흘러간다 적절한 갈등에 적절한 사건에 적절한 감초캐릭터들까지.나는 이 영화의 색깔을 모르겠다.


영화가 재미없는것은 아니었다.그렇다고 재밌는것도 아니었고.나는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이 몇몇있다.아빠 원상태와 딸 원도연의 캐릭터가 너무 스테레오타입같았다.그러니까 원상태가 가진 어떤 캐릭터특징이 있어야하는데 그런게 하나도없고 마찬가지로 딸 원도연도 캐릭터라고 할만한 그 어떤것도 없다.이건 몸이 뒤바뀌는 사건 이후에 더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캐릭터 연구가 안된 모습이었다.정소민이 연기하는 원상태가 몸이 바뀌기전 원상태의 진짜 모습인지 아니면 어딘가에 있을 누군가의 아빠흉내를 내는건지 헷갈렸다.그건 윤제문이 연기할때도 마찬가지다.나는 이 영화가 가장 중요한 캐릭터 두명을 너무 부실하게 건설했다고 단언한다.


미쟝센이랄것도 별로없다.영상미를 느낄 무언가도 없고.그냥 정말 고민없이 찍은영화라는 생각이 든다.평범하고 그냥 소소하고.그런것들이 찍기 더 어렵다는것을 알지만 2000년도에도 이런느낌의 코미디영화는 늘 있어왔다.지금 2017년도인데 그거 그대로 답습하는게 뭐랄까.신선한 느낌은 없었다.나름 웃긴포인트라고 중간중간 카메오들 숨겨놓고 감초캐릭터도 심어놓긴했지만 그다지.그것마저도 진부했다.그러니까 진부하다는건 익숙하다는 말인데 이영화는 그래서 거부감이 들진 않는다.왜? 너무 익숙하니까 이런거.그래서 딱히 기억에 남지도 않는다.공간이나 화면에 조금 더 신경쓰고 성격을 부여했으면 기억에 장면으로나마 남았을텐데 그런것도 없는걸보면 정말 무난한게 맞다.


두 배우의 연기는 나쁘지않다.정소민이나 윤제문이나 어렵지않은 캐릭터였기때문에 그냥 어렵지 않게 연기한다.정소민이라는 배우는 내가 잘 알고있는 배우는 아니지만 언젠가 한번 발성이 안좋다고 느낀적이 있었는데 <아빠는 딸>영화에서 그런모습은 전혀없다.조연 이미도도 감초역할은 잘 해냈다.


솔직히 동문들 졸업작품이 좀 더 신선하고 재밌을정도로 이건 뭐랄까.어떻게 투자받고 어떻게 제작하고 배급까지 됐는지 신기할정도로 진부하고 무난하다.투자자들은 이런걸 좋아하나?알게뭐람.가슴에 찡하게 남아서 하루종일 잠 못이루거나 너무 충격적이라 잠을 설치고싶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 진부하고 고리타분하고 무난한 영화를 추천한다.



용순 : 실전보다 치열한 연습

용순 : 실전보다 치열한 연습

Yongsoon, 2017

신준



열여덟살, 모든게 서투르고 미숙한 나이.그러나 모두에게 아름답게 회상되고 추억되는 그 시절.용순은 평범하지만 비범한 캐릭터이다.질기고 무서운 고집도 있고 질릴만큼의 집착도 가지고있다.전 글에서 가볍게 <용순>을 본 이야기를 썼었다.그 글에서 나는 용순이가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에 쉽지않을 캐릭터일거라고 말했다.지금도 그 생각에 큰 변화는 없다.우리가 글자 그대로 기억하는 청춘과 열여덟은 조금 더 햇빛이 내리쬔다고 생각하겠지만, 돌이켜보면 아집과 후회로 얼룩진 단면이 있을것이다.그래서 성장통이라는 말이 존재하는것 아니겠는가.

교복입고 학교에 다니던 시절,용순처럼 선생님을 연모하던 경험은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닐것이다.용순 또한 체육선생님을 좋아했다.어른이 느낄 수 있는 죄책감이나 책임감을 무기로 선생과 100일까지 반강제로 기념하게 되는 등 용순의 고집은 상대방이 나를 좋아하지 않을까봐 불안했던 심리에서 오는것이었다.어린시절 병든 엄마가 첫사랑과 떠나는것을 지켜봐야했던 용순은 장례식에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옷깃이라고 한번 잡아보고 매달려보지 못헀다는게 후회가 된 용순은 그렇게 자신의 첫사랑인 체육선생을 끝까지 붙잡으려 애 쓴다.영화 후반부, 빈 교실 한 가운데에서 벌어진 라이벌 아닌 라이벌이었던 영어선생과의 난투극은 안타까워 눈살이 찌푸려졌다.다 커버린 성인들의 세계에서 용순이 할 수 있는건 어린아이처럼 거짓말을 하며 사랑을 묶어놓고 수습할 수 없는 감정때문에 주먹질하는것으로 표출되었을것이다.

그러나 그게 비단 미성숙한 열여덟 용순만의 모습일까.첫사랑은 이루어질수없다는 말이 있듯, 용순은 그 앞에서 약아빠질정도로 치열했다.꽤 일방적인 첫사랑이지만 한여름의 공기처럼 뜨겁다.숨쉬는것이 치열해지는 과정.무더운 여름과 달리기는 서로 닮았다.그 뜨거운 아집과 뜨거운 공기속에서 쉬지않고 달리는 용순의 모습은 어쩌면 앞으로 살아갈 날을 위해 고단한 연습을하는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는 편하게 읽어내릴 수 있는 소설책 같았다.용순과 찰떡같이 붙어다니는 빡큐와 문희는 용순의 가족사도 알고있을정도로 절친하게 그려진다.말도안되는 작전을 세워서 임무수행하는 셋의 모습은 어설펐지만 단단해보였다.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만 하는 영화는 아니다.용순의 주변인물들을 더 중요하게 느낄 수 있도록 첫사랑이라는 관문을 용순에게 과제로 주었다고 볼 수 있다.적대시했던 몽골인 새 어머니.어릴때는 사이가 좋았지만 클수록 멀어진 아버지와의 관계.용순을 짝사랑하는 빡큐.빡큐에게 설렘을 느끼는 문희 등.체육선생보다 정말 더 중요했던건 용순을 위하던 그들일것이다.

선풍기를 다시 손보고 벽에 걸어주는 아버지와 마주앉아 이야기하는 용순은 자신의 폭력적이었던 순수함에 많은 감정을 느낀다.그리고 아버지가 어머니를 첫사랑에게 보내기까지 얼마나 깊은 아픔이 있었을지 알게된다.부녀의 유대관계가 상실이라는 줄로 다시 연결되었다.용순은 육상부활동을 하며 계주때문에 그냥 운동장을 뛰었었다.허나 엔딩에서 용순은 끝까지 매달려서 무언가 해보기위해서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는것을 느끼기위해서 운동장을 뛴다.바톤을 물려줄 주자가 없어도 뛴다.그 어느때보다 더 치열하게 달리는 용순은 지난날의 서투름과 자신안에 자리했던 비뚤어짐을 상기했을것이다.그 깊숙한곳에는 상처라는것도 있었을것이다.아무렴 어떤가.때로는 실전보다 연습이 더욱 값질수도 있다.




한국영화 : 유영

한국영화 : 유영




이 네 음절이 가지는 울림과 무게감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나는 한국영화를 사랑한다.


이동진 영화평론가는 적지 않은 한국영화들이 지나치게 뜨겁고 감정에만 호소한다는 글을 썼었다.그의 말대로 영화를 미시적 관점에서만 풀어낸다면 사회문제를 개인에 국한시킬 것이고 그 너머의 본질을 볼 수 없게 만들 것이다.사실 작품 안에서 사회구조가 만들어낸 병폐를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시키는 것은 너무 쉽다.쉽기 때문에스크린관이 도떼기시장이 된것이다.이러한 국내영화계 실태에 공감하면서도 마냥 질타하기엔 마음이 아리다.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상념하고 있을 사람들의 존재를 믿기 때문이다.


진짜 문제는 한국영화 보다 한국영화로 이익을 좇으려는 기업들에게 있다고 생각한다.그들은 실패를 통해 공부하는것을 반기지않는다.성공을 통해 사례를 도식화하는것을 중요하게 여긴다.그렇기 때문에 도전정신이 약화되는것이다.정확히 맞는 예일지는 모르겠다.<도둑들>의 대흥행이후 복수형제목이 우후죽순 생겨난것같다.<감시자들>,<기술자들>,<내부자들>,<검은사제들>등 다수의 캐릭터가 등장함을 제목에 명시하여 다양한 캐릭터의 서사를 기대하게 만든다.옴니버스형식의 영화는 각각의 인물들이 독립된 서사를 가진다.다만 그 호흡이 짧게 느껴질 수 있는데에 반해 앞서말한 -자들 영화들은 긴호흡으로 캐릭터성을 극대화시킨것이 아닐까싶다.그래서 <도둑들>이 먹혀들었다고 생각한다.


흥행작은 성공사례를 남기고 성공사례는 도식화된다.일종의 안전보험이라고 생각할테지만 난 이런점이 안전불감증과 비슷하다고 본다.한국형재난영화가 흥행하면 꽤 오랜시간동안 비슷한 맥락의 영화들이 생겨난다.그리고 그런영화들로 극장이 채워진다.이 상황에서 성공이 보장될까? 영화산업은 부흥할까?


요즘 극장에 가도 볼 영화가없다,한국영화 뻔하다,한국영화 시시하다,한국영화는 외국영화에 비해서 너무 작품성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는 이제 주변에서 쉽게 들려온다.뻔한 신파극과 가족애로 점철된 영화는 더 이상 관객을 끌어들이지 못하고있다.너무 많이 쏟아져나와서 피로감마저 느낀다.다양성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다양성과 창의성은 차라리 옛 영화에 있다.한국영화 르네상스시기라고 불리우던 2000년대 시기에 있고 아트시네마에 있고 해외영화제에 있다.그나마 독립영화관에서 상영이라도 되면 다행이다.배급사를 찾지못한 좋은작품들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소원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국내작품의 바다를 유영해주었으면 싶다이미 국내영화에 실망을 한 상태라할지라도 좋은작품들을 꼭 만날 수 있을것이다.신선하고 멋진영화는 계속 탄생중이다.


나는 며칠전만해도 신연식감독의 <러시안소설>을 만났다.훌륭하고 멋진작품.이런 작품들을 만나면 일주일이 개운하고 즐거워진다.밤에 잠을 자기 싫어지고 무엇을 창작해야할지도 모르겠지만 창작욕구가 솟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갖게해준다.어떻게든 만날 수 있다.능동적인 자세로 영화를 찾는다면 지루한 국내 메이져영화계에도 새로운 바람을 불어 넣을 수 있지않을까 생각한다.

.

나는 진정으로 믿는다.한국영화는 질떨어지지도않고 뻔하지도 않다고.그렇게 보이게끔 만드는 큰 장사치들이 있을뿐이다.지금은 발밑에 진흙덩이만 느껴지겠지만 조금만 파내면 지천에 널린것이 진주일테다.


국뽕이라면 할 말 없다만 나는 한국영화계가 심적으로 고립된사람들을 품어주는 하나의 문화로 성장하길 바라고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어딘가에서 글을 쓰며 훗날 영화감독을 꿈꾸는 누군가를 위해 보다 풍요로워져야할 이 세계의 장래를 믿는다.






인서전트 : 얼리전트로 가기 위한 통행료

인서전트 : 얼리전트로 가기 위한 통행료

 


Insurgent, 2015

 


먼저 다이버전트 이야기를 하고 인서전트로 넘어가려 한다.일단 다이버전트 시리즈는 굉장히 많이 공을 들인 영화라고 할 수 있다.속편이 나오는 영화의 첫편이 대부분 그러하듯 다이버전트 또한 배경과 인물에 설명에 충실한편이다.물론 그 구조와 스토리가 평면적이고 자주 학습된 내용이지만 CG작업과 OST가 영화의 개성을 드러내며 질을 높여주었다.앞서 나온 헝거게임,이퀼리브리엄과 비슷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때문에 낯설지 않은 영화이며,뒤 이어 개봉한 메이즈러너와도 비슷한 맥락이다.약간의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가미된 SF영화가 이토록 많이 존재한다.그 사이에서 다이버전트의 출발은 순조로웠다.


하지만 인서전트가 이 순조로운 출발에 제동을 걸어버렸다.결론부터 말하자면 인서전트는 다이버전트의 속편으로 존재하기엔 너무 나약하다.그 부록이라면 모를까.이미 세계관은 다이버전트에서 설명이 되었고 인물들의 행동에는 동기가 존재했다.그런데 인서전트는 이를 부실하게 반복한다.새로운것은 단 하나.트리스의 성장을 위한 촉진제 '비밀의상자'가 등장한다는것이다.


너무 포괄적으로 그려진 이 상자때문에 영화 감상이 더뎌진다.인서전트에 따른 이 상자의 정의 첫번째,부모님이 목숨을 걸고 지키려던 물건이다.두번째,도시의 창조자들의 메시지가 들어있다.가장 큰 문제는 다이버전트에서 이에 대한 정보나 복선이 많이 부족했다는점이다.애러다이트의 수장 제닌에 의해 갑자기 나타난 이 물건을 어떻게 아무런 의문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가.심지어 영화의 모든 핵심을 쥐고있는 이 상자를. 


그러다보니 우스운 꼴이 연출된다.관객들은 이 상자를 끝까지 지켜야 할 목적도 근거도 공감하지 못한 채 주인공무리의 사투를 보게 되는것이다.인물의 행동에는 동기가 탄탄해야한다.그렇지 않으면 개그꽁트와 다를 바 없다.이런 점을 너무 간과하지 않았나 싶다.


트리스를 성장시키는 상자의 역할도 창조자의 메시지도 급작스럽지만 조연들의 위치 또한 난감하다.특히 포는 캐릭터를 상실했다고 볼 수 있을정도로 매력이 보이지 않는다.다이버전트의 공을 세운 캐릭터 1순위가 포일텐데 이정도로 그림자에 가려질 줄 몰랐다.트리스와 깊은 애정을 보이는 씬도 부족하고 무분파 엄마와 만나게되며 겪는 포의 복잡한 심리도 제대로 다뤄지지 않는.다이버전트의 포와 인서전트의 포는 다른인물이다.특히 트리스의 친오빠인 케일럽의 존재가 가장 어정쩡하다.방해요소도 도움을 주는 요소도 아닌 이 존재를 어찌해야할까.인서전트가 개봉하기 전 <안녕헤이즐>,<위플래쉬>로 몇몇 배우들이 활약을 했고 이는 인서전트의 흥행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유리한 말을 가지고도 체스를 못두는 모양새가 안타까웠다.


다이버전트와 인서전트의 감독이 바뀌면서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있었으리라 짐작한다.이를 작업하는 중간에 발견하지 못했다면 암담하다.다시 말하지만 인서전트는 다이버전트의 부록,혹은 마블의 영화처럼 엔딩크레딧이 올라간 후 쿠키영상 정도로 생각된다.앞으로가 중요하다.관객들은 후속편인 얼리전트로 가기 위한 의미없는 통행료를 지불했다.톨게이트를 빠져나왔을 때 지금과 다른 광경을 그려내야만 할 것이다.





 

 



스물 : 왜 감독의 스무살이 궁금할까

스물 : 왜 감독의 스무살이 궁금할까

 

Twenty, 2014

 

 

굉장히 애매한 영화를 한편 보게 되었다.그저그런 코미디물인줄 알았는데,아니 맞는데,아닌것같다.재밌다 재미없다를 나누기 어려운 그 지점에 위치한 영화가 이 영화가 아닐까싶다.가장 의외인것은 극중인물보다 감독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는것이다.왠지 모르게 나랑 공통분모가 많을것같은 느낌이 든다.정확히 말하자면 감독의 스무살이 궁금해지게끔 만드는 작품이었다.

 

극 중 모든 캐릭터들은 똘끼가 충만하다.대조되는 캐릭터가 없을만큼 작은 조연들마저도 세놈들과 이상하게 아귀가 잘 맞아 떨어진다.그래서 인물들의 대화가 굉장히 가공된 느낌을 받았다.마치 핑퐁을 하듯 반사적으로 주고받는 대사들이 모두 설계되어있다.영화 전반에 걸쳐진 이런 대사들은 캐릭터의 디테일을 살리는데에 한계가 있다. 별것아닌 대사 한마디에도 인물들의 특징을 잘 살릴 수 있지만 아쉽게도 스물에서 기대 할 부분은 아니다.공부만 잘하는 놈, 생활력만 좋은 놈, 인기만 많은 놈 모두가 처해진 배경만 다를뿐이지 기본적으로 같은 재료로 세팅된 인물이다.어떻게 보면 이 세놈들이 친구가 될 수 밖에 없는 공통분모일지도 모른다.

 

세 놈들의 화두는 대부분 섹스 이야기다.그 정점에 최치호가 있다.사실 치호의 모든 언행들이 미드나 영드속에서 관찰할 수 있는 부류이기에 이질감을 느낄 수 있다.대한민국의 스무살 청년들을 간과하는 이야기일지는 모르겠으나 '스물'이라는 제목 두글자가 던져 준 예상과 기대에 치호는 과연 적합한 인물일까 라는 의문이 남는것은 사실이다.물론 혈기왕성한 세 청년들의 관심사가 이성과 섹스임은 자연스럽다.그들의 음담패설과 자위행위까지 개구지게 담아내는것도 나쁘지는 않다.극장 안 모든 사람들을 잠깐 당황시킨 '네 엉덩이에 내 고추 비비고싶어'이런 대사도 어떻게 보면 귀엽다.물론 스무살이라는것을 계속 감안하면서 봐 줘야 가능한 이야기이다.

 

전체적으로 큰 스토리라인이 없다는것도 이 영화의 특징이다.무언가 커다란 사건이나 갈등이 없다.아니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세 캐릭터가 각자 자기 씬을 챙겨가기 바빠서 그 안의 갈등들은 1차원적이고 무언가의 패러디같다.스무살이 됐는데 뭐가 이렇게 없냐라는 말 처럼 이 영화도 뭐가 없다.온전하고 자연스럽다.장점이자 단점이 될 수 있겠다.런닝타임이 길었다는게 흠으로 느껴진다.물론 갈등요소가 거대해야 좋은 영화라는 뜻은 아니다.다만 스물은 긴 시간을 끌고 갈 정도의 흡인력과 사건이 없었기에 그에따른 부작용도 있을터다.아쉬운 점 또 하나는 세놈들의 유대관계가 생각보다 드러나지 않았다는점이다.고작해야 자신들의 트러블을 가지고 소소반점에서 모이는게 전부.인물 모두가 각자의 삶을 살다보니 셋이 같이 모여 작당모의를 하고 사고를 치는 청춘물의 공식이 없는셈이다.그래 어떻게보면 이것도 지금의 스물과 다르지 않을것이다.

 

영화의 중반부에 다다랐어도 감독에 대한 궁금증은 생기지않았다.여기까지만해도 내가 보고있는 이 영화는 미국 하이틴물을 표방한 그저 그런영화였기때문이다.환기는 치호가 신인여배우인 은혜를 만나며 시작된다.아무 욕심도 걱정도 비전도 없던 치호가 은혜의 매니저역할을 하면서 영화판에 간접적으로나마 들어서게 되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치호가 영화감독을 꿈꾸는 계기가 된다.그저 스토리상 전개일 수 있겠지만 나는 감독의 이야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이미 세 인물 모두가 감독의 모습이 많이 투영된것같다고 느끼다가 이 대목에서 확실해졌다.극 밖을 빠져나와 감독의 스무살을 주제로 다른 시나리오를 그려보게 된다.다른 관점에서 환기 된 관객이 있다는것은 영화의 성공이다.하지만 집중이 극 밖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은 어떻게보면 실패일 수 있다.그래서 이 영화가 굉장히 애매하다.

 

고추행성 외계인들의 이야기 또한 감독이 학교다닐 시절 썼던 시나리오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이때부터 나는 치호가 극 중 치호의 역할을 하는것이 아닌 감독의 투영체 역할을 한다고 정의내렸다.구조상 덧붙여진 이야기를 제외하면 말이다.영화감독 또한 감독의 투영체같았다.영화하지마 힘들어,잘생겼네 모델해 모델, 아니야 모델도 힘들어, 장사해 장사, 아니야 장사도 하지마 힘들어.치호와 극중 감독의 대화는 투영체1과 투영체2의 대화같았다.여기저기 감독이 존재한다.스물 자체가 그런 영화가 아닌가싶다.글쎄,감독과 친구라도 된듯한 느낌을 받은건 처음이다.철없던 시절 친구들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보내던 때를 생각나게 한다.당신 또한 그런 시절을 보내지 않았느냐 이야기해주는것 같기도.영화를 꿈으로 품었거나 조금 공부를 해보았거나 직접 허섭하게라도 찍어 본 학생이 있다면 아마 나와 비슷한 감상이 나오지 않았을까.나름 이 부류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연결고리가 있을지 모른다.그리고 나는 스물에서 이런 고리를 본 느낌이다.기대했던 스토리와 많이 달랐지만 기대하지도 않았던 친구를 만난 느낌은 나쁘지않다.그럼에도 역시 스물은 뭔가 애매하다.이따금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을 떠올렸지만 그에 반할 수준은 절대 아니다.비유하자면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장점을 제거하고 극으로 다듬어진 느낌이다.스물 그 청춘의 살아움직이는 에너지를 느끼고 싶다면 앞서말한 영화를 보길 바란다.

 

재밌어서 한번 더 보고 두번 더 보는 영화가있다.스물은 모르겠어서 한번 더 봐야할것같은 느낌이 드는 영화다.몇번 더 본다 할지라도 지금과 같을테다.스물의 정의는 애매함같다.영화 스물이 아닌 진짜 스물의 정의를 일컫는중이다.

 

 

 

 

 


킹스맨 : 안티히어로가 아닌 전형적인 히어로물

킹스맨 : 안티히어로가 아닌 전형적인 히어로물







Kingsman: The Secret Service, 2015



굳이 킹스맨 리뷰는 하고싶지않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팅을 하는 한가지 이유.이례적인 기록을 달성중이기 때문이다.청소년관람불가 영화는 흥행에 있어 제한적이지만 킹스맨은 상승곡선을 타며 보란듯이 자리매김했다.나로서는 조금 의아하면서도 한편으로 이해가 된다.킹스맨은 분명히 대중들을 사로잡을 요소가 충분하다.하지만 훌륭한 영화라고 할 수 없다는것이 내 견해다.


킹스맨을 보며 가장 감탄했던 부분은 비주얼디렉팅과 카메라워킹.특히 교회난투씬은 카메라가 그 타격감과 긴박함을 쫄깃하게 살렸다고 할 수 있겠다.액션씬에 있어서 화면의 호흡은 아주 좋다.또한 디테일한 소품부터 전체적인 그림까지 굉장히 잘 설계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하지만 영화를 보는 이유는 단순히 화면과 미술을 보기위해서는 아니다.


너무나도 전형적이다.전형적인것이 절대 나쁜것은 아니지만 킹스맨은 고전 히어로물의 고리타분한 전개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며 고작 인물들의 대사몇마디로 히어로물을 풍자했다고한다.자조적으로 영화를 감상하는 사람이라면 이것을 제 살 깎아먹기라고 말하지 않을까.나는 이것을 풍자가 아닌 방어라고 부른다.왜냐.킹스맨은 이미 모든 구조가 고전히어로물과 똑 닮아있으므로.관객들도 그것을 느끼므로.먼저 나서서 자신의 약점을 인물의 대사를 통해 드러낸다.이런 경우에 속된말로 선수친다는 표현이있다.


더욱 맘에 안드는점은 주인공 에그시의 성장과정이 지나치게 많이 생략되어있다는 점.무쓸모한 훈련씬들은 자주나오면서 정작 에그시가 클라이막스에서 활약하기 전 단계,그러니까 힘을 싣어줘야 하는 부분에서 하나의 당위성도 만들어주지를 않는다.그저 자신의 스승이 죽었기 때문에 그 복수를 위해 머리회전이 잘되는 그런 소년인가?에그시가 천부적 재능을 타고났기때문에 성장과정을 통째로 배제할만했다면 킹스맨본부에 들어가 테스트를 받는 모든 씬 또한 무의미한 장면이 된다.발렌타인의 기지로 쳐 들어가 작전을 수행하는 에그시와 그 전의 에그시는 전혀 다른인물이다.이만큼 차이가 벌어진 두 에그시를 설명하기위해 브릿지역할을 해주는 씬이 어느 한군데도 없다.


같은맥락으로 킹스맨 내 모든 인물들은 1차원적 평면캐릭터다.단순히 영화안에서 작동하기 위한 캐릭터로 존재한다.인물들이 가진 비쥬얼과 성격을 빼고나면 영화안에서 캐릭터가 살아숨쉬는지 궁금할 따름이다.가장 중요한 악역인 발렌타인 또한 마찬가지이다.그가 계획하는 프로젝트에 대한 구체적 설명과 당위성은 존재하지않는다.그저 그가 인류를 바이러스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알려주지않는다.왜냐하면 그냥 발렌타인은 악당이기 때문이다.반대로 에그시는 그냥 주인공이기 때문에,킹스맨이기 때문에 성장과정을 알 수 없음에도 완벽한 임무수행을 한것에 대해 그냥 납득해야한다.뭐 이런 상호교환이 안되는 영화가 다 있는가.

(솔직히 고전 히어로물들이 전부 킹스맨같지는 않다.흐름은 같지만 킹스맨의 리듬은 무언가 더 언밸런스했다.이것이 편집의 문제인지는 알 수 없다.)


존재이유를 알 수 없는 캐릭터들의 시간뺏기는 계속된다.에그시와 입단시험 동기인 록시.도대체 왜 존재하는것일까.이유는 간단하다.그냥 영화의 뻔한 결말을 위해서 소모되는 캐릭터일뿐.나는 이 영화와 등장하는 모든캐릭터들이 허울만 좋다고 생각한다.동시에 안타깝다.더욱 매력적으로 그려 낼 수 있을텐데.소모품으로만 존재한다니.


이 영화가 정말 액션 스릴러영화인가.긴장감이 너무나 없는데.뻔한 결말과 구조를 가지고있는데.영화초반에 이미 천릿길이 보여 기대감은 일찍 포기했다.그렇다면 오락성에만 의지를 해야한다.킹스맨이 가진 오락성이 이 모든 단점들을 커버할 수 있는가.글쎄.충분히 재치는 있었다.그런데 그것도 그뿐이다.양념가지고 메인요리는 못 하는법이다.순간의 웃음이 영화 전체의 맥락을 좌지우지하는 못하니까.


지금도 이 영화는 참으로 약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아무리 몇몇 대사들로 히어로물을 풍자하고 꼬집었다한들 관객들의 시간은 내내 전형적인 구조와 함께 흘러간다.영화는 시간과 함께 흘러가는 스토리임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있다.그래서 킹스맨은 안티히어로 영화가 아닌 완벽한 히어로영화라 말 할 수 있다.누군가가 쓴소리 한다면 이미 킹스맨에서 자기들도 알고있는 부분인데요?원래그런건데요?라고 선수 칠 구석까지 있다.이것이 목적이고 의도대로라면 훌륭하다.


원래그런것이다.이것만큼 불도저같은 말이 있을까.이 영화는 원래 그렇기 때문에 너의 의문은 묵살해라.아니면 니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원래 그렇다고 답 할 수 밖에 없다.이런것인가.어떠한 작품이든 무언가를 감상하고 그에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나눌 수 있기때문에 여기까지 컨텐츠가 발전할 수 있는것이라 느낀다.다양한 피드백들을 원래 그런 영화.라는 말 한마디로 이해하라는것은 오히려 이해할 여지도 주지않는것과 같다.


킹스맨을 보는내내 내 시간은 충분히 아까웠다.누군가에게 더할나위 없는 오락성만을 안겨주는 좋은영화일 수 있겠지만 내겐 그저 감상 외에 아무런 틈도 주지않는 영화였다.









이웃집 토토로 : 나는 애어른이 아프다

이웃집 토토로 : 나는 애어른이 아프다







My Neighbor Totoro , 1988





곧 마무리를 해야하는 과제 중 하나이다.오늘 글을 쓰지 않으면 가슴이 답답함을 못 벗어날 것 같아서 자판을 두들긴다.이웃집 토토로를 자신의 철학으로 분석하는 과제인데 생각지도 못하게 마음이 참 무거웠다.솔직히 그냥 아팠다.계속 울면서 봤는데 그간 본 애니메이션을 통틀어 마음이 아팠다.토토로를 이렇게 마음아프게 보는 사람이 또 있을런지 모르겠다.미야자키 하야오에 대한 약간의 편견은 있다.나같이 세상 삐뚤어진 맛으로 파헤치길 좋아하는 사람은 보통 그렇다.아름다운 선율이 흐르는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은 판타지 그 자체다.현실과의 괴리감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미야자키는 언제나 동심과 자연 순수함을 강조하는 친환경적인 감독이다.나 또한 그를 진심으로 존경한다.하지만 애니메이션이 아름다워도 현실은 현실일뿐.아름답지 못하고 추한것들이 넘쳐난다.몸을 파는 창녀,가난한 자영업자들에게서 일수뜯는 일수꾼들,불법사채업자들,홍등가에서 색을 산것이 명예훈장인냥 자랑해대는 저급한 부류들,학대를 일삼는 사람들.밝은 볕이 드는 맞은편엔 언제나 그림자가 존재한다.그럼에도 미야자키하아오의 작품이 아름다운 이유는 마음속에 동심이라는것이 존재한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보통은 토토로를 자연의 신, 토테미즘 관점으로 많은 분석을 하며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관과 연결짓는데, 나는 그보다 사츠키와 메이를 보며 너무나도 마음이 아팠던 이야기를 하고싶다.갈등이 고조 된 뒷부분에선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내 자신이 안타깝게 느껴졌다.내게 두 아이는 나의 어린시절을 투영하는 듯 했다.나이답지않게 기특한아이,철이 일찍 든 아이.결국은 제 속도로 살지 못하는 아이들인데 어른들은 항상 칭찬을 해주었다.잘컸다.어쩜 이렇게 예쁘니.나는 정말 어렸을때 예쁘게 크고 있었던 걸까.아이는 아이다워야한다면서 아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운 아이를 기특하다며 칭찬을 해준다.아이러니하다.세상은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게 모순으로 돌아가는것 같다. 하지만 모순이 흉측하단 말은 아니다.그냥 조금 씁쓸할 뿐이다.


할말이 참 많다.나는 글속에 나를 반영하게끔 영감을 주는 예술을 좋아한다.다른사람들은 재미없다고 말 하더라.재밌었다고 하더라도 토토로를 단순히 밝고 명랑한 애니영화 중 하나로만 생각하겠지.분명한건 하나다.이 작품이 아름다운 이유는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현실과 너무 달라서 의구심을 남긴다는것에 있다.아이들은 상처를 잘 받는다.어른들이 아무리 잘해준다 한들 상처받고 풀죽는게 어린아이들의 특징.삶이 고단한 어른들은 더 그렇다.열심히 살아보는거다.자기들은 자식새끼들 먹여살린다고 뼈가 빠지도록 애환에 맺혀사는데 어린 새끼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나는 이웃집 토토로가 이런 맥락과 비슷하다 생각한다.아무것도 몰라서 더 슬프다.그리고 두 아이가 일찍 철이 들어야만 하는 환경이 아팠다.메이는 엄마의 보호가 누구보다 더 필요할 나이이다.사츠키 또한 마찬가지로 어리다.메이가 사츠키의 학교에 찾아오는 날이 있다.아이가 아이의 엄마역할을 대신 할 수 밖에 없다.마음이 무너지는것 같았다.왜냐고.나는 철저하게 사츠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중 하나이기 때문이다.물론 사츠키는 나에 비하면 복 받았지.따뜻하고 상냥한 아빠.아이들에게 따뜻함을 안겨줄 엄마.시원한 바람과 탁 트인 초록풍경들 전부 보며 자랄테니 나보단 복 받았다.그리고 따지고 보면 크게 문제 될 이유도 없다.나혼자 심각하게 생각하는게 맞다.


메이와 사츠키는 행복할게 분명하다.미야자키의 아이들은 언제나 밝은 풍경속에 녹아든다.사실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니다.


다만 영화 내내 보여지는 탁 트이고 예쁜 풍경들보다 아이들이 항상 불안함을 가져야했던 그 클라이막스가 나는 더 기억에 남을 뿐이다.사츠키는 마을 할머니를 만나서 운다.엄마는 저번에도 퇴원한다고 했지만 오지않았다고.엄마의 죽음을 예상하며 힘겹게 우는 아이의 모습이 정말 동심을 위한 애니메이션일까.토토로는 어른들이 보아야 한다.그리고 끝없이 반성하고 죄책감을 가지며 살아야한다.우리가 어른이 된다는것에 대한 죄책감.어이없는말이 아니라 진짜로 그렇다.시간이 흐르는건 너무 당연하고 어른이 되는것도 너무 당연한데 무엇을 반성해야 하느냐.되새길것이 없다는 어른이 있다면 계속 그렇게 살면된다.그 어른이나 나나 아이들에게 미안해하며 사는 어른이나 똑같다.결국엔 다 똑같다.그런다고 어른이 아이의 눈높이에서 무언가 충족시켜줄 수 없다.서로의 세계가 다르기 때문이다.이거 좀 신앙적인 이야기인가? 원죄를 알라고 했다.그냥 어른인게 원죄인거다.말해 뭣하나.아이는 상처받는다.받을 수 밖에 없고 그게 모두 어른들의 탓은 아니다.어른들도 상처를 받는다.우리가 아이가 너무 빨리 어른이 되지 않도록 다독거려주는것이 최고의 방법일 것이다.다시한번 말하지만 애어른은 기특한것도 칭찬해줄일도 아니다.나는 그래서 애어른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