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오지 않는 밤, 작은 성공에 대하여

잠이 오지 않는 밤, 작은 성공에 대하여

 

제출한 시나리오를 다시 검토했을때 나는 좌절했다. 엉망도 이런 엉망이 없었다. 밀도 낮은 씬과 허무맹랑한 대사들이 둥둥 떠다녔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다시 물었을때 나는 대답을 쉽사리 할 수 없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아직 내 철학조차 없는 나부랭이니까. 절박했지만, 1차 통과도 하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나를 덮쳤다. 탈고도 제대로 못한 시나리오에 기대를 걸기엔 양심이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게다가 절박한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지원한 모두가 절박했고 간절했다. 그냥 도전 자체에 의미를 두고 마음을 비웠다.

 

운이 좋았던건지 진짜로 내 아이템을 좋게 봐준건지 나는 1차 서류전형에 합격했다.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 면접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또 내 심장을 짓눌렀다. 면접이란 무엇인가. 나를 한예종에서 떨어지게 만든 그 문제적시험 아닌가. 내 작품에 대한 철학조차 확고하지 않은 상태로 면접을 보면 승산이 있기는 한건가. 이제는 진짜 마음을 비울 때가 되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맹연습을 했다. 감사하게도 정보를 주는 이들이 많아서 그 정보를 토대로 셀프 면접을 진행해봤고, 친구의 도움을 얻어 모의면접 또한 진행해봤다. 면접 에티튜드 같은 것도 좀 얻어가면서. 솔직히 겁나 무서웠는데 솔직하게 임하자고 각오했다.

 

면접은 역시 무서웠다.한예종 면접보다는 덜 압박스러웠지만 짧은 시간이내에 그들이 기대하는 답을 꺼내놓기엔 내 머리가 따라주지 않았다. 분명 듣는 면접관들도 이 친구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의아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말하면서도 내가 그걸 느꼈으니까. 예상질문은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시나리오가 구리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시나리오에 대한 지적이 많이 들어왔다. 주제의식이나 작품의 방향성에 대해서도 질문이 들어왔다. 현문우답이었다. 망했다. 완전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강퇴당하듯 화상면접이 빨리 끝나버렸고 남은 나는 허무함과 아쉬움에 가만히 노트북 화면만 바라보았다. 면접이 끝난건가. 동시에 드는 생각, 나도 끝난건가.

 

망한 건 망한거고 할 건 해야했다. 바로 노트북을 챙겨 카페로 이동했다. 다음 공모전을 위해 트리트먼트를 작성해야했다. 근질근질. 나의 망한 면접후기에 대해 지인에게 입을 털고싶었지만, 지인도 스트레스가 큰지 내 면접에 큰 관심이 없어보이길래 그냥 별 말 하지 않고 계속 작업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저녁이 됐을 때 나는 문자 한통을 받았다. 최종합격문자였다.

 

규모가 크고 작고, 그런 것이 중요한게 아니었다. 나는 늘 이런 기회가 필요했고 고팠다. 도전하고 얻을 수 있는 성취감. 이 성취감이 필요했다. 내게 연료가 되어 날 움직여 줄 성취감이 필요했다. 절실했었던 것이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런데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앞서 말한 죄책감 같은 것이었다. 이 따위 시나리오로 합격해도 되는건가 싶은, 그런 일종의 양심의 가책같은거. 온전히 내가 이룬 성공인가 생각 해 보았을때 전혀 아닌 점. 외면하고 싶은 부분이지만 분명히 내가 기억해야 할 부분이기도 했다. 나는 이 시나리오를 쓰는데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영원히 기억할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시나리오를 완성시킬 수 있을정도의 능력을 만드는것에 총력을 다 할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다. 부끄럽지 않은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지 않아도 이미 성정이 그렇게 시키고 있다. 부끄러운게 졸라 싫다.

 

합격의 기쁨에 흥분해서 잠이 오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죄책감이 어깨위로 슬며시 올라와 있다. 그래서 오늘은 잠이 오지 않는 밤이다. 아까 집에 돌아오는 길에 하늘에 뜬 달이 예쁜 손톱달이었는데, 지금 창문을 열어서 하늘을 바라봐도 손톱달이려나. 반지하라서 창문을 열어도 시멘트 바른 빌라의 벽만 들어 찰 뿐이다. 나는 조금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보자 욕심을 내보고 싶다. 오늘 얻은 이 자그마한 성취감을 벗 삼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