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일탈1

일상 일탈1


졸업상영회 기간동안 재밌는일이 많았다.정말 간만에 폐 속 깊이 겨울공기를 마셨다.제대로 호흡하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상영회 전날 친구 한명과 이화여대로 동창 졸업전시회를 보러갔다.서양화전공 전시홀인 3층 계단입구에 걸린 그림을 보자마자 따뜻하다고 느꼈는데 그게 지 그림이란다.원래도 뛰어나게 잘그리는 친구인데 이 정도로 성장했나 싶어서 괜히 내가 벅차올랐다.혼자서 해외여행을 많이 다니는 그 친구는 낯선사람과의 만남도 낯선풍경속에 들어가 노는것도 잘하는 유쾌한앤데,그림에 그 성정이 잘 드러난것 같았다.기차 좌석에 기저귀만 찬 아이는 빛이 들어오는 창밖을 바라보고있었다.아주 따뜻하고 위로가되는 노곤노곤한 그림.빠르게 달려가는 기차안에서 아이를 바라보는 친구의 시선은 평화로웠다.제목을 지어주어도 되느냐 물었더니 그러란다.그래서 내 맘대로 제목을 <청춘>이라고 지었다.흘러가는 시간속에서 창밖을 내다보는 아이의 시선이 마치 지난날의 회고록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태국음식점에서 배를 채운 후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그 시간에 동심으로 돌아갔다.두 서양화 전공 사이의 친구사이에 오가는 대화도 재밌었고(내 밑천이 얕아 알아들을 수 있는 주제는 제한적이었지만) 오랜만에 만나 우리 고등학교 시절 얼마나 병신같이 재밌었는지 떠들어댔더니 마냥 행복했다.수업시간에 실기 째고 컵라면먹다 담임선생님께 들킨것,종례시간이 일찍 끝날줄 알고 미리 가글하고있는데 종례가 길어져서 결국 그대로 삼킨것,내가 맨날 너 괴롭혔잖아.우리 맨날 비행기 담요덮고 침흘리고 잤잖아.그것도 교탁바로 앞자리에서.우리끼리 얼마나 엎어져서 웃어댔는지 정수리보고 대화 한 기분이었다.내가 주문한 레몬그라스도 잘 우려내주었다.기분이 둥실둥실 정수리 위를 떠다녔다.모르겠다.복잡하다고 느꼈던 서울사람들도 혼잡한 거리도 너무나 설레고 신이났다.친구한명이 시간이 늦어져 자리를 떴다.전시회장을 오래 비울 수 없었던 친구도 자리를 떴다.나도 다른 친구 자취방으로 떴어야했는데 그러기 싫었다.애들이 잔뜩 흘리고 간 탄맛나는 브라우니 부스러기를 포크로 모아서 한번 떠먹고는 2층으로 자리를 옮겼다.혼자만의 시간이니 라벤더티를 주문했다.


생전 비행기도 타본적없는데 외국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2층은 외국인들이 정말 많았다.사촌오빠가 추천해준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을 조용히 읽고 있었다.작게 깔리는 잔잔한 카페음악,주변에서 들려오는 아주 조금은 알아들을것같은 영어와 중국어.확실히 뭔가 피어났다.라벤더티는 진하게 우려져 독했지만 모든게 다 좋았다.분위기 좋은 칵테일바 구석에서 혼자 취하는 느낌에 몸이 나른해졌다.아 진짜 피어나는것같아.돈암으로 갈까 생각하던 찰나 전시회손님을 보내고 온 친구가 내 앞 빈의자에 앉았다.두시간만의 재회인데 난 얘가 너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셋에서 혼자,혼자에서 둘이 된 우리의 대화주제는 개인적이고 가정적인 부분을 넘나들었다.긍정적이고 밝던 그 친구는 자신이 요즘 오춘기 같다며 구구절절 사정을 늘어놓았다.내가 모르는 사이 너는 어떤 그늘을 껴안고 살았을까? 문득 궁금해졌다.인간관계는 언제나 어렵지만 제일 어려운건 역시 가족이려나.몇시간 넘에 대화하는통에 돈암사는 친구와의 약속시간을 많이 넘겼다.결국 그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같은 예고친구라 얘친구가 내친구고 내친구가 얘친구고 쟤친구도 얘친구고 내친구다.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너때문에 광어랑 연어회 사놓고 파스타,스테이크 다 해놨단말이야 시발년아.그리고 너 혼자오지마.같이와.내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가 화나지도 않았으면서 화난척했다.나도 미안하지 않았지만 미안하다고 말했다.우리는 짐을챙겨 카페를 나섰고 친구의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이대 친구가 환장하게 좋아하는 고구마말랭이를 듬뿍안고서.


그 친구 집에 비싼 와인은 잔뜩있는데 오프너가 말썽이라 결국 싸구려 스파클링 와인을 땄다.엄청난 먹성을 자랑하는 예고친구들,그니까 우리는 그냥 겁나 먹었다.회를 특대로 포장해왔는데 그걸 한시간만에 다 먹어치우고 친구는 냉동고를 열어 스테이크를 해동했다.로즈마리랑 좋은 오일로 진공포장 된 최상급스테이크란다.냉동실에서 나온 그건 마치 열무김치와 같이 썩은 고기비주얼이었지만.전에 일하던 레스토랑에서 셰프와 친해진 친구는 그 셰프가 몰래 뒷구멍으로 빼돌리는 좋은 고기와 식자재들을 많이 얻었다고한다.집안은 쓰레기 난장판인데 냉장고만큼은 호텔 뺨치게 값나가는것들로 가득했다.그게 재밌어서 뜨끈한 바닥에 등을 지지며 킥킥댔다.양송이 브로콜리 어니언찹 겨자씨머스타.환상의 조합으로 스테이크까지 다 먹고나서도 우리(정확히 나)는 배가고파서 파스타를 해먹으려했다.친구한명은 이미 쓰러져 자고 나는 배가고프고.깨어있는 친구한테 컵라면 먹으로 편의점가지않겠냐는 아주 매력적인 제안을했는데 단칼에 거절당했다.결국 귀찮아서 나도엎어져서 뒹굴뒹굴 거리고 있는데 문득 내가 백팩을 PC방에 두고 온 사실이 생각났다.시계를 보니 새벽4시였다.시발.거기에 돈 다 있고 내 속옷도 다 있는데 변태놈들이 가져갔으면 어떡해.잠들려던 친구를 얼른 깨웠다.짜증내는애를 달래고 달래 새벽에 거리를 가로질러 지하철역앞 PC방으로 들어갔다.친구 알바 심부름 하느라 잠깐 같이 들렀다가 내가 옆자리에 백팩을 두고왔어 찡찡.카운터에 물어보니 검은색 가죽 백팩은 분실물 목록에 없단다.가방을 찾아다니면서도 서울 PC방 한번 드럽게 넓네 따위의 생각을 하고있었고,잠이 덜깬 친구가 어디서 찾아왔는지 한손에 백팩을 들고 내 앞에섰다.고마워서 뽀뽀해줄까 싶었는데 욕쳐먹을까봐 말았다.그리고 백팩을 건네받자마자 친구를 따돌리고 나 혼자 집으로 겁나게 뛰어갔다.차가운 바람이 슬리퍼차림의 맨발가락 사이사이를 가르고 들어왔다.웬만한 가게문은 다 닫혔고 거리는 넓은데 사람은 없고 그 뻥뚫린느낌이 얼마나좋은지 1학년 OT때 끝끝내 술로 선배들 다 이기고 호텔복도를 뛰어다니던 뭣도 모르던 그 해방감처럼 끝내줬다.비슷할진 모르겠는데 레이서들이 이런 쾌감에 속력을 내나봐.욕하면서 죽일기세로 쫒아오는 친구를 난 이미 목적지에 도착해 행복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야 문잠겼어.얘가 내려와서 따줘야돼.그래서 또 둘이 킥킥킥.잠든애를 전화해서 깨웠더니 이년저년죽일년 한참 욕을하더니 나는 xx x 남자를 만나고싶다라고 크게 삼창하면 대문을 열어주겠다며 협박했고 나는 신나게 삼창했다.궁시렁대면서 문을 열어준 친구에게 또 사랑한다고 애교피우고 둘이 쏙 들어갔다.신발벗자마자 들어가 바닥에 뒹굴거렸다.아 얘네 집 바닥 진짜뜨겁고 따뜻하고 좋아.아깐 맨발이 시렵고 추웠는데 지금은 불로 지지는것같아.오늘만 같으면 나 평생을 재밌게 살 수 있을것같다.리스테린 한 통 들이마신것처럼 시원하다 못해 얼얼한 즐거움이 식도를 꽉 채웠다.즐겁다.오늘 즐겁다.몇년만에 이 말을 입으로 뱉을 수 있어서 나의 하루를 같이 보내준 세 친구에게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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