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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서전트 : 얼리전트로 가기 위한 통행료

인서전트 : 얼리전트로 가기 위한 통행료

 


Insurgent, 2015

 


먼저 다이버전트 이야기를 하고 인서전트로 넘어가려 한다.일단 다이버전트 시리즈는 굉장히 많이 공을 들인 영화라고 할 수 있다.속편이 나오는 영화의 첫편이 대부분 그러하듯 다이버전트 또한 배경과 인물에 설명에 충실한편이다.물론 그 구조와 스토리가 평면적이고 자주 학습된 내용이지만 CG작업과 OST가 영화의 개성을 드러내며 질을 높여주었다.앞서 나온 헝거게임,이퀼리브리엄과 비슷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때문에 낯설지 않은 영화이며,뒤 이어 개봉한 메이즈러너와도 비슷한 맥락이다.약간의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가미된 SF영화가 이토록 많이 존재한다.그 사이에서 다이버전트의 출발은 순조로웠다.


하지만 인서전트가 이 순조로운 출발에 제동을 걸어버렸다.결론부터 말하자면 인서전트는 다이버전트의 속편으로 존재하기엔 너무 나약하다.그 부록이라면 모를까.이미 세계관은 다이버전트에서 설명이 되었고 인물들의 행동에는 동기가 존재했다.그런데 인서전트는 이를 부실하게 반복한다.새로운것은 단 하나.트리스의 성장을 위한 촉진제 '비밀의상자'가 등장한다는것이다.


너무 포괄적으로 그려진 이 상자때문에 영화 감상이 더뎌진다.인서전트에 따른 이 상자의 정의 첫번째,부모님이 목숨을 걸고 지키려던 물건이다.두번째,도시의 창조자들의 메시지가 들어있다.가장 큰 문제는 다이버전트에서 이에 대한 정보나 복선이 많이 부족했다는점이다.애러다이트의 수장 제닌에 의해 갑자기 나타난 이 물건을 어떻게 아무런 의문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가.심지어 영화의 모든 핵심을 쥐고있는 이 상자를. 


그러다보니 우스운 꼴이 연출된다.관객들은 이 상자를 끝까지 지켜야 할 목적도 근거도 공감하지 못한 채 주인공무리의 사투를 보게 되는것이다.인물의 행동에는 동기가 탄탄해야한다.그렇지 않으면 개그꽁트와 다를 바 없다.이런 점을 너무 간과하지 않았나 싶다.


트리스를 성장시키는 상자의 역할도 창조자의 메시지도 급작스럽지만 조연들의 위치 또한 난감하다.특히 포는 캐릭터를 상실했다고 볼 수 있을정도로 매력이 보이지 않는다.다이버전트의 공을 세운 캐릭터 1순위가 포일텐데 이정도로 그림자에 가려질 줄 몰랐다.트리스와 깊은 애정을 보이는 씬도 부족하고 무분파 엄마와 만나게되며 겪는 포의 복잡한 심리도 제대로 다뤄지지 않는.다이버전트의 포와 인서전트의 포는 다른인물이다.특히 트리스의 친오빠인 케일럽의 존재가 가장 어정쩡하다.방해요소도 도움을 주는 요소도 아닌 이 존재를 어찌해야할까.인서전트가 개봉하기 전 <안녕헤이즐>,<위플래쉬>로 몇몇 배우들이 활약을 했고 이는 인서전트의 흥행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유리한 말을 가지고도 체스를 못두는 모양새가 안타까웠다.


다이버전트와 인서전트의 감독이 바뀌면서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있었으리라 짐작한다.이를 작업하는 중간에 발견하지 못했다면 암담하다.다시 말하지만 인서전트는 다이버전트의 부록,혹은 마블의 영화처럼 엔딩크레딧이 올라간 후 쿠키영상 정도로 생각된다.앞으로가 중요하다.관객들은 후속편인 얼리전트로 가기 위한 의미없는 통행료를 지불했다.톨게이트를 빠져나왔을 때 지금과 다른 광경을 그려내야만 할 것이다.





 

 



스물 : 왜 감독의 스무살이 궁금할까

스물 : 왜 감독의 스무살이 궁금할까

 

Twenty, 2014

 

 

굉장히 애매한 영화를 한편 보게 되었다.그저그런 코미디물인줄 알았는데,아니 맞는데,아닌것같다.재밌다 재미없다를 나누기 어려운 그 지점에 위치한 영화가 이 영화가 아닐까싶다.가장 의외인것은 극중인물보다 감독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는것이다.왠지 모르게 나랑 공통분모가 많을것같은 느낌이 든다.정확히 말하자면 감독의 스무살이 궁금해지게끔 만드는 작품이었다.

 

극 중 모든 캐릭터들은 똘끼가 충만하다.대조되는 캐릭터가 없을만큼 작은 조연들마저도 세놈들과 이상하게 아귀가 잘 맞아 떨어진다.그래서 인물들의 대화가 굉장히 가공된 느낌을 받았다.마치 핑퐁을 하듯 반사적으로 주고받는 대사들이 모두 설계되어있다.영화 전반에 걸쳐진 이런 대사들은 캐릭터의 디테일을 살리는데에 한계가 있다. 별것아닌 대사 한마디에도 인물들의 특징을 잘 살릴 수 있지만 아쉽게도 스물에서 기대 할 부분은 아니다.공부만 잘하는 놈, 생활력만 좋은 놈, 인기만 많은 놈 모두가 처해진 배경만 다를뿐이지 기본적으로 같은 재료로 세팅된 인물이다.어떻게 보면 이 세놈들이 친구가 될 수 밖에 없는 공통분모일지도 모른다.

 

세 놈들의 화두는 대부분 섹스 이야기다.그 정점에 최치호가 있다.사실 치호의 모든 언행들이 미드나 영드속에서 관찰할 수 있는 부류이기에 이질감을 느낄 수 있다.대한민국의 스무살 청년들을 간과하는 이야기일지는 모르겠으나 '스물'이라는 제목 두글자가 던져 준 예상과 기대에 치호는 과연 적합한 인물일까 라는 의문이 남는것은 사실이다.물론 혈기왕성한 세 청년들의 관심사가 이성과 섹스임은 자연스럽다.그들의 음담패설과 자위행위까지 개구지게 담아내는것도 나쁘지는 않다.극장 안 모든 사람들을 잠깐 당황시킨 '네 엉덩이에 내 고추 비비고싶어'이런 대사도 어떻게 보면 귀엽다.물론 스무살이라는것을 계속 감안하면서 봐 줘야 가능한 이야기이다.

 

전체적으로 큰 스토리라인이 없다는것도 이 영화의 특징이다.무언가 커다란 사건이나 갈등이 없다.아니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세 캐릭터가 각자 자기 씬을 챙겨가기 바빠서 그 안의 갈등들은 1차원적이고 무언가의 패러디같다.스무살이 됐는데 뭐가 이렇게 없냐라는 말 처럼 이 영화도 뭐가 없다.온전하고 자연스럽다.장점이자 단점이 될 수 있겠다.런닝타임이 길었다는게 흠으로 느껴진다.물론 갈등요소가 거대해야 좋은 영화라는 뜻은 아니다.다만 스물은 긴 시간을 끌고 갈 정도의 흡인력과 사건이 없었기에 그에따른 부작용도 있을터다.아쉬운 점 또 하나는 세놈들의 유대관계가 생각보다 드러나지 않았다는점이다.고작해야 자신들의 트러블을 가지고 소소반점에서 모이는게 전부.인물 모두가 각자의 삶을 살다보니 셋이 같이 모여 작당모의를 하고 사고를 치는 청춘물의 공식이 없는셈이다.그래 어떻게보면 이것도 지금의 스물과 다르지 않을것이다.

 

영화의 중반부에 다다랐어도 감독에 대한 궁금증은 생기지않았다.여기까지만해도 내가 보고있는 이 영화는 미국 하이틴물을 표방한 그저 그런영화였기때문이다.환기는 치호가 신인여배우인 은혜를 만나며 시작된다.아무 욕심도 걱정도 비전도 없던 치호가 은혜의 매니저역할을 하면서 영화판에 간접적으로나마 들어서게 되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치호가 영화감독을 꿈꾸는 계기가 된다.그저 스토리상 전개일 수 있겠지만 나는 감독의 이야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이미 세 인물 모두가 감독의 모습이 많이 투영된것같다고 느끼다가 이 대목에서 확실해졌다.극 밖을 빠져나와 감독의 스무살을 주제로 다른 시나리오를 그려보게 된다.다른 관점에서 환기 된 관객이 있다는것은 영화의 성공이다.하지만 집중이 극 밖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은 어떻게보면 실패일 수 있다.그래서 이 영화가 굉장히 애매하다.

 

고추행성 외계인들의 이야기 또한 감독이 학교다닐 시절 썼던 시나리오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이때부터 나는 치호가 극 중 치호의 역할을 하는것이 아닌 감독의 투영체 역할을 한다고 정의내렸다.구조상 덧붙여진 이야기를 제외하면 말이다.영화감독 또한 감독의 투영체같았다.영화하지마 힘들어,잘생겼네 모델해 모델, 아니야 모델도 힘들어, 장사해 장사, 아니야 장사도 하지마 힘들어.치호와 극중 감독의 대화는 투영체1과 투영체2의 대화같았다.여기저기 감독이 존재한다.스물 자체가 그런 영화가 아닌가싶다.글쎄,감독과 친구라도 된듯한 느낌을 받은건 처음이다.철없던 시절 친구들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보내던 때를 생각나게 한다.당신 또한 그런 시절을 보내지 않았느냐 이야기해주는것 같기도.영화를 꿈으로 품었거나 조금 공부를 해보았거나 직접 허섭하게라도 찍어 본 학생이 있다면 아마 나와 비슷한 감상이 나오지 않았을까.나름 이 부류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연결고리가 있을지 모른다.그리고 나는 스물에서 이런 고리를 본 느낌이다.기대했던 스토리와 많이 달랐지만 기대하지도 않았던 친구를 만난 느낌은 나쁘지않다.그럼에도 역시 스물은 뭔가 애매하다.이따금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을 떠올렸지만 그에 반할 수준은 절대 아니다.비유하자면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장점을 제거하고 극으로 다듬어진 느낌이다.스물 그 청춘의 살아움직이는 에너지를 느끼고 싶다면 앞서말한 영화를 보길 바란다.

 

재밌어서 한번 더 보고 두번 더 보는 영화가있다.스물은 모르겠어서 한번 더 봐야할것같은 느낌이 드는 영화다.몇번 더 본다 할지라도 지금과 같을테다.스물의 정의는 애매함같다.영화 스물이 아닌 진짜 스물의 정의를 일컫는중이다.

 

 

 

 

 


킹스맨 : 안티히어로가 아닌 전형적인 히어로물

킹스맨 : 안티히어로가 아닌 전형적인 히어로물







Kingsman: The Secret Service, 2015



굳이 킹스맨 리뷰는 하고싶지않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팅을 하는 한가지 이유.이례적인 기록을 달성중이기 때문이다.청소년관람불가 영화는 흥행에 있어 제한적이지만 킹스맨은 상승곡선을 타며 보란듯이 자리매김했다.나로서는 조금 의아하면서도 한편으로 이해가 된다.킹스맨은 분명히 대중들을 사로잡을 요소가 충분하다.하지만 훌륭한 영화라고 할 수 없다는것이 내 견해다.


킹스맨을 보며 가장 감탄했던 부분은 비주얼디렉팅과 카메라워킹.특히 교회난투씬은 카메라가 그 타격감과 긴박함을 쫄깃하게 살렸다고 할 수 있겠다.액션씬에 있어서 화면의 호흡은 아주 좋다.또한 디테일한 소품부터 전체적인 그림까지 굉장히 잘 설계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하지만 영화를 보는 이유는 단순히 화면과 미술을 보기위해서는 아니다.


너무나도 전형적이다.전형적인것이 절대 나쁜것은 아니지만 킹스맨은 고전 히어로물의 고리타분한 전개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며 고작 인물들의 대사몇마디로 히어로물을 풍자했다고한다.자조적으로 영화를 감상하는 사람이라면 이것을 제 살 깎아먹기라고 말하지 않을까.나는 이것을 풍자가 아닌 방어라고 부른다.왜냐.킹스맨은 이미 모든 구조가 고전히어로물과 똑 닮아있으므로.관객들도 그것을 느끼므로.먼저 나서서 자신의 약점을 인물의 대사를 통해 드러낸다.이런 경우에 속된말로 선수친다는 표현이있다.


더욱 맘에 안드는점은 주인공 에그시의 성장과정이 지나치게 많이 생략되어있다는 점.무쓸모한 훈련씬들은 자주나오면서 정작 에그시가 클라이막스에서 활약하기 전 단계,그러니까 힘을 싣어줘야 하는 부분에서 하나의 당위성도 만들어주지를 않는다.그저 자신의 스승이 죽었기 때문에 그 복수를 위해 머리회전이 잘되는 그런 소년인가?에그시가 천부적 재능을 타고났기때문에 성장과정을 통째로 배제할만했다면 킹스맨본부에 들어가 테스트를 받는 모든 씬 또한 무의미한 장면이 된다.발렌타인의 기지로 쳐 들어가 작전을 수행하는 에그시와 그 전의 에그시는 전혀 다른인물이다.이만큼 차이가 벌어진 두 에그시를 설명하기위해 브릿지역할을 해주는 씬이 어느 한군데도 없다.


같은맥락으로 킹스맨 내 모든 인물들은 1차원적 평면캐릭터다.단순히 영화안에서 작동하기 위한 캐릭터로 존재한다.인물들이 가진 비쥬얼과 성격을 빼고나면 영화안에서 캐릭터가 살아숨쉬는지 궁금할 따름이다.가장 중요한 악역인 발렌타인 또한 마찬가지이다.그가 계획하는 프로젝트에 대한 구체적 설명과 당위성은 존재하지않는다.그저 그가 인류를 바이러스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알려주지않는다.왜냐하면 그냥 발렌타인은 악당이기 때문이다.반대로 에그시는 그냥 주인공이기 때문에,킹스맨이기 때문에 성장과정을 알 수 없음에도 완벽한 임무수행을 한것에 대해 그냥 납득해야한다.뭐 이런 상호교환이 안되는 영화가 다 있는가.

(솔직히 고전 히어로물들이 전부 킹스맨같지는 않다.흐름은 같지만 킹스맨의 리듬은 무언가 더 언밸런스했다.이것이 편집의 문제인지는 알 수 없다.)


존재이유를 알 수 없는 캐릭터들의 시간뺏기는 계속된다.에그시와 입단시험 동기인 록시.도대체 왜 존재하는것일까.이유는 간단하다.그냥 영화의 뻔한 결말을 위해서 소모되는 캐릭터일뿐.나는 이 영화와 등장하는 모든캐릭터들이 허울만 좋다고 생각한다.동시에 안타깝다.더욱 매력적으로 그려 낼 수 있을텐데.소모품으로만 존재한다니.


이 영화가 정말 액션 스릴러영화인가.긴장감이 너무나 없는데.뻔한 결말과 구조를 가지고있는데.영화초반에 이미 천릿길이 보여 기대감은 일찍 포기했다.그렇다면 오락성에만 의지를 해야한다.킹스맨이 가진 오락성이 이 모든 단점들을 커버할 수 있는가.글쎄.충분히 재치는 있었다.그런데 그것도 그뿐이다.양념가지고 메인요리는 못 하는법이다.순간의 웃음이 영화 전체의 맥락을 좌지우지하는 못하니까.


지금도 이 영화는 참으로 약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아무리 몇몇 대사들로 히어로물을 풍자하고 꼬집었다한들 관객들의 시간은 내내 전형적인 구조와 함께 흘러간다.영화는 시간과 함께 흘러가는 스토리임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있다.그래서 킹스맨은 안티히어로 영화가 아닌 완벽한 히어로영화라 말 할 수 있다.누군가가 쓴소리 한다면 이미 킹스맨에서 자기들도 알고있는 부분인데요?원래그런건데요?라고 선수 칠 구석까지 있다.이것이 목적이고 의도대로라면 훌륭하다.


원래그런것이다.이것만큼 불도저같은 말이 있을까.이 영화는 원래 그렇기 때문에 너의 의문은 묵살해라.아니면 니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원래 그렇다고 답 할 수 밖에 없다.이런것인가.어떠한 작품이든 무언가를 감상하고 그에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나눌 수 있기때문에 여기까지 컨텐츠가 발전할 수 있는것이라 느낀다.다양한 피드백들을 원래 그런 영화.라는 말 한마디로 이해하라는것은 오히려 이해할 여지도 주지않는것과 같다.


킹스맨을 보는내내 내 시간은 충분히 아까웠다.누군가에게 더할나위 없는 오락성만을 안겨주는 좋은영화일 수 있겠지만 내겐 그저 감상 외에 아무런 틈도 주지않는 영화였다.









이웃집 토토로 : 나는 애어른이 아프다

이웃집 토토로 : 나는 애어른이 아프다







My Neighbor Totoro , 1988





곧 마무리를 해야하는 과제 중 하나이다.오늘 글을 쓰지 않으면 가슴이 답답함을 못 벗어날 것 같아서 자판을 두들긴다.이웃집 토토로를 자신의 철학으로 분석하는 과제인데 생각지도 못하게 마음이 참 무거웠다.솔직히 그냥 아팠다.계속 울면서 봤는데 그간 본 애니메이션을 통틀어 마음이 아팠다.토토로를 이렇게 마음아프게 보는 사람이 또 있을런지 모르겠다.미야자키 하야오에 대한 약간의 편견은 있다.나같이 세상 삐뚤어진 맛으로 파헤치길 좋아하는 사람은 보통 그렇다.아름다운 선율이 흐르는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은 판타지 그 자체다.현실과의 괴리감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미야자키는 언제나 동심과 자연 순수함을 강조하는 친환경적인 감독이다.나 또한 그를 진심으로 존경한다.하지만 애니메이션이 아름다워도 현실은 현실일뿐.아름답지 못하고 추한것들이 넘쳐난다.몸을 파는 창녀,가난한 자영업자들에게서 일수뜯는 일수꾼들,불법사채업자들,홍등가에서 색을 산것이 명예훈장인냥 자랑해대는 저급한 부류들,학대를 일삼는 사람들.밝은 볕이 드는 맞은편엔 언제나 그림자가 존재한다.그럼에도 미야자키하아오의 작품이 아름다운 이유는 마음속에 동심이라는것이 존재한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보통은 토토로를 자연의 신, 토테미즘 관점으로 많은 분석을 하며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관과 연결짓는데, 나는 그보다 사츠키와 메이를 보며 너무나도 마음이 아팠던 이야기를 하고싶다.갈등이 고조 된 뒷부분에선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내 자신이 안타깝게 느껴졌다.내게 두 아이는 나의 어린시절을 투영하는 듯 했다.나이답지않게 기특한아이,철이 일찍 든 아이.결국은 제 속도로 살지 못하는 아이들인데 어른들은 항상 칭찬을 해주었다.잘컸다.어쩜 이렇게 예쁘니.나는 정말 어렸을때 예쁘게 크고 있었던 걸까.아이는 아이다워야한다면서 아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운 아이를 기특하다며 칭찬을 해준다.아이러니하다.세상은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게 모순으로 돌아가는것 같다. 하지만 모순이 흉측하단 말은 아니다.그냥 조금 씁쓸할 뿐이다.


할말이 참 많다.나는 글속에 나를 반영하게끔 영감을 주는 예술을 좋아한다.다른사람들은 재미없다고 말 하더라.재밌었다고 하더라도 토토로를 단순히 밝고 명랑한 애니영화 중 하나로만 생각하겠지.분명한건 하나다.이 작품이 아름다운 이유는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현실과 너무 달라서 의구심을 남긴다는것에 있다.아이들은 상처를 잘 받는다.어른들이 아무리 잘해준다 한들 상처받고 풀죽는게 어린아이들의 특징.삶이 고단한 어른들은 더 그렇다.열심히 살아보는거다.자기들은 자식새끼들 먹여살린다고 뼈가 빠지도록 애환에 맺혀사는데 어린 새끼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나는 이웃집 토토로가 이런 맥락과 비슷하다 생각한다.아무것도 몰라서 더 슬프다.그리고 두 아이가 일찍 철이 들어야만 하는 환경이 아팠다.메이는 엄마의 보호가 누구보다 더 필요할 나이이다.사츠키 또한 마찬가지로 어리다.메이가 사츠키의 학교에 찾아오는 날이 있다.아이가 아이의 엄마역할을 대신 할 수 밖에 없다.마음이 무너지는것 같았다.왜냐고.나는 철저하게 사츠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중 하나이기 때문이다.물론 사츠키는 나에 비하면 복 받았지.따뜻하고 상냥한 아빠.아이들에게 따뜻함을 안겨줄 엄마.시원한 바람과 탁 트인 초록풍경들 전부 보며 자랄테니 나보단 복 받았다.그리고 따지고 보면 크게 문제 될 이유도 없다.나혼자 심각하게 생각하는게 맞다.


메이와 사츠키는 행복할게 분명하다.미야자키의 아이들은 언제나 밝은 풍경속에 녹아든다.사실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니다.


다만 영화 내내 보여지는 탁 트이고 예쁜 풍경들보다 아이들이 항상 불안함을 가져야했던 그 클라이막스가 나는 더 기억에 남을 뿐이다.사츠키는 마을 할머니를 만나서 운다.엄마는 저번에도 퇴원한다고 했지만 오지않았다고.엄마의 죽음을 예상하며 힘겹게 우는 아이의 모습이 정말 동심을 위한 애니메이션일까.토토로는 어른들이 보아야 한다.그리고 끝없이 반성하고 죄책감을 가지며 살아야한다.우리가 어른이 된다는것에 대한 죄책감.어이없는말이 아니라 진짜로 그렇다.시간이 흐르는건 너무 당연하고 어른이 되는것도 너무 당연한데 무엇을 반성해야 하느냐.되새길것이 없다는 어른이 있다면 계속 그렇게 살면된다.그 어른이나 나나 아이들에게 미안해하며 사는 어른이나 똑같다.결국엔 다 똑같다.그런다고 어른이 아이의 눈높이에서 무언가 충족시켜줄 수 없다.서로의 세계가 다르기 때문이다.이거 좀 신앙적인 이야기인가? 원죄를 알라고 했다.그냥 어른인게 원죄인거다.말해 뭣하나.아이는 상처받는다.받을 수 밖에 없고 그게 모두 어른들의 탓은 아니다.어른들도 상처를 받는다.우리가 아이가 너무 빨리 어른이 되지 않도록 다독거려주는것이 최고의 방법일 것이다.다시한번 말하지만 애어른은 기특한것도 칭찬해줄일도 아니다.나는 그래서 애어른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