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ㄴ'

나의 'ㄴ'



누구였지 그게.내가 초등학교 놀이터에 홀로 있을때 '너 휘파람 참 잘분다'며 옆을 지나가던 사람이.


해가 기울던 때였다.학교 운동장은 주황빛이었다.밤이면 살아움직일 동상들의 그림자로 채워진 운동장은 찬가를 들을 준비가 됐다는 신호를 보냈다.눈치가 참 빨랐다.꾸물대는 그것들을 바라보고있자니 어둠이 오기전에 빨리 노래를 불러줘야 했다.사라지기전에 빨리.입술을 오므리고 후우 하는 바람소리를 뱉어냈다.입술 끝에 조금 더 힘을주고 소리가 빠져나갈 구멍을 점점 좁혔다.휘익 하는 소리가 구멍을 통해 흘러나왔다.탱탱한 국수가닥을 뽑아내듯 계속 휘익 소리를 뽑아냈다.소리가 찬가가 되기까지 채 10분도 걸리지않았다.음악시간에 배운 노래를 불러볼까.머리통은 다음 찬가를 고르느라 분주해졌다.이거 다음에는 저거,저거 다음에는 이거.예쁜 색으로 익어있던 흙바닥도 점점 냉동고에 쳐박아둔 동태색깔로 변해가고 있었다.나도 국수가닥을 뽑아내느라 바빴다.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건 예쁜 무지개빛 실타래같은것이었다.나풀거리며 입으로 토해지고 있는 실반죽들을 나는 보았다.


그게 버릇이 되었다.수업이 끝나고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들도 하나 둘 저녁을 먹으러 집으로 사라져갈때 얼마나 짜릿하던지.자정이 되면 이순신동상이 살아 움직인다는 괴담은 순전히 괴담일뿐이었다.자정이 아니었다.노을이 질 때였다.그걸 아는 사람은 나뿐이겠지.내 손바닥에 내가 칭찬도장을 찍어주고 춤을추듯 입술을 오므렸다 펴며 매일 노래를 불렀다.


내 두번째 집.아무도 없었다.비어있는데도 많은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종소리도 없었다.떠드는 소리도 없었다.선생님들의 자동차도 없었다.대신 내가 보던것들은,떡볶이 한컵정도는 공짜로 먹겠다는 야심으로 철봉아래 흙바닥을 파헤쳐놓고 도망간 두더지들.뺑뺑이를 돌려대며 그 힘을 견디느라 손마디에 물집에 잡힌채 돌아가는 바보들.마른 모래사이로 축축히 젖어있는 짙은색의 동그라흙더미와 그 위에 꽂혀있는 나무막대기 하나.모든게 어지럽혀있는데 좋았다.조용하지만 상상만 하면 다시 시끌벅적해질 수 있는 공간이 좋았다.그래서 다시 살아나라며 예쁜 휘파람을 그렇게 불어대며.그네에 앉아서 멍하니 어느곳을 바라본게 아니라.전부 보고 느끼고 만지고 듣느라 운동장이 동태색깔이 되어서야 일어났다.그 날도 다른날과 다를바 없었다.


인상이 좋은 중년의 아주머니였던가.무섭게 생긴 아저씨였던가.이제와 생각하면 나와같은 20대중반의 어떤 언니였는지.내가 모르던 학교선생님이었는지.내 옆을 지나간다는 느낌조차 받지못했는데.나에게 그랬다.너 휘파람 참 잘분다며.따뜻한 표정과 웃음.춤추던 동상의 그림자들과 분주하던 내 입술근육과 출렁이던 그네줄과 모든것이 느리게 감겼다.해가 느리게 꺼졌다.


너 휘파람 참 잘분다

너 휘파람 참 잘분다.

참 잘분다.

너.


그 다음날부터 나는 휘파람 부는것을 그만두었다.수업이 끝나면 우르르 쏠려나가는 아이들 틈에 끼어 같이 교문밖으로 나갔다.춤추는 유혹을 물리치며 자꾸 자꾸 외면했다.나를 부르는 정글짐도 무시하고,모래더미에 끼어 있는 반달모양의 고무타이어도 무시하고.내가 앉아있지 않아 비어있을줄 알았던 그네는 본적 없는 언니나 오빠들이 앉아있었다.왜 그랬을까.나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같았는데.나는 내가 항상 그네에 앉아 휘파람부는것을 알고있었지만 휘파람을 부는동안은 휘파람을 분다는 자각이 없었다.그냥 그 순간이 좋았었다.칭찬에 놀란건지.놀랐는데 칭찬인건지.두근대는건 설레서 그랬는지,무서워서 그랬는지.계절이 바뀔때까지 놀이터에 남아서 홀로 휘익 휘익 대는 일은 없었다.학년이 바뀔때까지도 없었다.종종 놀이터에 남아있기 했지만 쉽사리 입술이 오므려지지 않았다.말하는법을 까먹은 사람같았다.춤춘다고 느낀 동상들의 그림자도 따분하기 그지없어졌다.나와 같이 노래하며 춤추던 공간이 그냥 공간이 되었다.내 놀이터가 그냥 놀이터가 되었다.


다시 뉘엿뉘엿 해가 지고있었다.누구였더라 그게.누구였더라 나한테 칭찬을 한게.누구였더라 내 공간을 망친게.








'Essay > Bullshit'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교회를 싫어하는 진짜 이유  (0) 2018.10.15
나의 'ㄷ'  (0) 2018.04.21
나의 'ㄱ'  (0) 2018.04.17
누가 나를 안아줬으면  (0) 2018.03.13
[망시리즈] 대한민국 입시미술은 망했다  (0) 2017.09.19